짬뽕국물앞에서 울었던 사연은?

2011. 3. 22. 12:13다시가고 싶은집(맛집은 아니고~)

※ 지난날의 추억속으로...

람들은 누구나 어떤 음식을 보면 그 음식에 관련된 아름답거나 슬프거나 했던 옛추억을 떠올립니다. 

박씨아저씨도 그런 음식에 대한 추억들을 이야기 하자면  참으로 많습니다.

요즘이야 그래도 잘살지는 않지만 그때처럼 그렇게 어렵지 않기에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먹을수 있으니 그런일들이 생기지도 않겠지만

그시절 박씨아저씨에게는 정말 슬프고도 가슴아팟던 짬뽕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91년 1월 중순의 어느날 일이었으니 벌써 20년이 지나버렸습니다.

하지만 그날의 일들이 아직까지 가끔 떠오르는것을 보니 아마도

그때의 일들이 어린마음에는 많이도 슬펐던 모양입니다.

 

그때가 91년 1월중순 군대에서 전역(1월21일)한지 얼마지나지

않아 고향집에서 운전면허증을 취득하기 위해서 학원을 다니고

있을무렵이었습니다.

그당시 학원비가 28만원정도였었는데 꽤나 큰돈이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가정형편이 여의치않아 놀면서 집에서

용돈을 받고 학원비받고 하기에는 자존심강한 박씨아저씨 양심이

허락하지 않을때...

큰맘먹고 부모님 설득해서 30만원이란 거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받은 30만원으로 학원비28만원을 지불하고 나머지 2만원은 한달동안 학원과 고향집을 오가는데 사용할 토큰으로 모두 바꾸었습니다.

 

사실 박씨아저씨 군입대전에 벌써 나름 괜챦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대학등록금도 벌고 용돈도 쓰고(한달에 30만원 넘게 받았슴)하면서 부모님에게

손내밀지 않고 큰소리 치면서 살았었는데 군전역후 다시 그 회사로 취직을 하기로 했었는데...

전역후에 의기양양하게 그 회사를 찾아가니 "동종업계랑 손을잡고 통합을 하는바람에 내자리가 없어졌다~" 

 "그리고 지금은 채용계획이 없으니 한달뒤에 다시와 보라~" 는 믿기지 않은 말을 듣고는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줄 알았습니다.

아마도 처음으로 겪는 가장 큰 좌절이 아니었나 싶었습니다.실로 충격이었습니다.

사실 제대말년 나를따르는 수많은 쫄따구들은 전역당시 큰소리로 떠들었던 "내가 사회 나가 있을때 느그들 찾아오면 내가 함쏜다~"

나의 호언장담을 철썩같이 믿었는지~얼마후 그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저녁무렵 평소처럼 운전연습을 마치고 나오는데 학원정문앞에 왠 군바리넘들이 여러넘(정확히 여섯넘인가!) 박씨아저씨를 발견하고..

 "일또옹 차렷~ 박뱀께 경례~초~옹~성~~~"

그랬습니다.제대말년에는 "충성" 이 아니고 '총성'이였습니다.

그래야 나름 좀 멋있고 군기 좀빠진 말년병장 같았으니~ 그후배넘들도 "총성~" 이였습니다.

군대 있을때 친하게 지냈던 쫄병놈들이 전역할때 박씨아저씨가 이야기했던 그말을 찰떡같이 믿고 말년휴가를 나오는날 떼거지로 박씨아저씨를

찾아온것입니다. 서울사는놈,부산넘 대전놈등등.. 이건 완죤히 짭봉도 아니고 '휴가나왔으면 곧장 집으로 가야지~' 박씨아저씨를 찾아왔으니...

하지만 마음뿐 반갑게 웃으면서 포옹하고 악수도 했지만 빈털털이 박씨아저씨의 머리속에는 주머니속에 토큰밖에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그시절 요즘처럼 카드가 있었던것도 아니고...

이렇게 찾아온넘들 매정하게 돌려 보낼수도 없고해서 먼저 시골집에 전화를 해서 어머니에게 군대 후배들이 찾아왔는데 자고갈것~이라고 이야기를

해놓고 학원앞에 있는 중국집으로 후배넘들을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어차피 마을로 가는 버스가 오려면 2시간 정도 기다려야했기에 저녁은 고향집에서 먹기로 하고 소주나 한잔 하면서 그동안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볼

요량이었습니다.

주머니에 돈이 없었기에 기가죽기 싫어서 무작정 짬뽕국물과 고량주를 시켰습니다.

사실 소주를 마셔도 되지만 소주보다 독한 꼬량주를 마셔야 군바리들이 빨리 취하기 때문에 일부러 꼬량주를 시켰습니다.

짬봉국물이 나오고 고량주가 한두잔 돌면서 그동안의 군대이야기를 들으면서 겉으로는 호탕하게 웃고 맞장구도 쳐주고 했었지만 박씨아저씨

마음속으로는 너무나도 초라한 자신이 슬프고 부끄럽고 한스러웠습니다.

            어느듯 동네로 가는 버스가 올시간이 되어 박씨아저씨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휴가나온 군바리들에게...

 " 야 느그들 오늘 차비는 내가 낼테니까...느그들이 행님한테 함쏴라" 라고 이야기 하고 주머니에 있는 버스 토큰을 하나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때의 심정 지금 생각해도 부끄럽고 미안하고 참으로 가슴이 아파옵니다.

 

 버스를 타고 고향집에 도착하니 방에는 울어무이 나름정성을 들여 저녁상을 준비해 두시고 별도로 숨겨둔 술까지 내어주시면서...

"시골이라 묵을것도 없고 너무 급해서 차린기 빈빈챦네요~다음에 오면 맛난거 마이해주께요" 하시면서 정말  미안해하시는 모습을

보았지만 그때 당시에는 미안한 마음이라고는 조금도 없었습니다.

이미 고량주에 약간은 술이 취해버린 후배넘들 어머니에게 한껏 군바리 정신을 발휘해서 큰소리로...

"어무이 감사합니다~ 마이묵겠습니다~~"

그리고 얼마지나지 않아 후배넘들은 먼길을 오느라 피곤한탓도 있었지만 모처럼 마신 고량주와 술때문에 모두들 따뜻한 아랫목에 몸을 뉘이고

꿈나라로 헤메고 있을무렵 박씨아저씨는 잠이 오지 않아 조용히 마당으로 나왔습니다.

시간이 자정을 넘겼지만 술도 취하질 않았고 잠도 오지를 않았습니다. 하늘을 보니 휘영청 떠있는 보름달은 왜그리도 차갑게 느껴지는지...

늦겨울 찬바람이 두볼을 비벼고 지나가지만 추운줄도 몰랐습니다.

 

그때 인기척을 느껴 돌아보니 조용히 박씨아저씨의 모습을 지켜보시던 어머니 큰방으로 들어오라고 하셨습니다.

            잠시후 방에 들어가 어머니앞에 앉으니..."미안태이~"

         어머니의 그한마디를 듣는순간 서러운 마음이 복받쳐 오르고 이제껏 참고있던 눈물이 마구마구 쏱아져내렸습니다.

그모습을 본 어머니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리고... 와락 어머니를 부둥켜안았습니다.

그렇게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한참을 흐느끼며 울었습니다.(그때나 지금이나 왜그렇게 서러웠는지...)

 

다음날 아침을 먹고 후배넘들 간다고 어머님에게 인사를 하고 박씨아저씨도 후배넘들과 함께 나가려는데...

어머니 박씨아저씨를 부르시더니 한손에 꼬깃꼬깃한 만원짜리 두장을 꼭 쥐어주시면서~

"자들 읍내가서 뭐라도 좀 사주고 보내라.그냥 보내마 되나"

아마도 지난날밤 우리 어머니 박씨아저씨의 그모습에 많이도 괴로워하고 한숨도 주무시지 못하고 많이 울었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참 철이 없었던 것인지...

모자라는 것인지...

그렇게 해서 후배넘들 다 돌려 보내고 ...그이후로 전화 몇통화 오고가고 했었는데 지금은 연락도 되지않고 다들 잘살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후 박씨 아저씨도 한달뒤에 건설회사에 취직해서  이런저런 우여곡절도 겪고 지금까지도 살아오고 있지만 유독 짬뽕만 보면 그때의

철없었던 일들이 떠오르곤 합니다.

과연 그후배넘들 박씨아저씨가 짬뽕국물에 고량주 마시면서 속으로 그렇게 울었던 것을 알고나 있는지...

 

글을 마치면서...

이글은 예전 2008년도에 박씨아저씨가 쓴글입니다. 그때당시 그리 알려지지도 않았고 또 읽으신 분들도 몇분되지 않습니다.

오늘 옛추억을 더듬으며 옛날 글들을 읽다보니 그때 생각을 하면서 다시 수정하였습니다.

그때 찾아왔던 후배들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배영철 병장,김재봉 병장,김현종병장,박정주병장,고광민병장)한명은 갑자기 이름이

가물가물 하네요~ 다들 잘살고 있는지 얼굴이라도 아니면 전화통화라도 한번 해보고 싶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