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지정이후 양동마을 과연 어떻게 변했을까?

2011. 1. 4. 07:30쓴소리단소리

※양동마을은 없고 가계만 있었다~

년 한국시간으로 8월1일브라질에서 열린제34차 세계유산위원회 회의에서 경주의 양동마을과

안동의 하회마을이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는 기쁜날이었습니다.

일전에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전에 서너번 양동마을을 찾았었고 또 그에 관련한 포스팅도

두번을 했었기에 양동마을의 유네스코의세계문화유산 지정소식은 박씨아저씨에게도 큰기쁨이었습니다.

과연 양동마을이 유네스코 지정이후 어떻게 달라졌는지? 또 관리는 잘되고 있는지 사뭇 궁금했습니다.

현재 박씨아저씨가 근무하고 있는곳이 포항입니다.

양동마을과도 불과 20여분 정도의 거리에 있다보니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달려갈수 있지만 마을을

돌아보려면 제법 시간이 걸려 쉽게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토요일 블로그를 통해 알고 지내던 분이

양동마을을 방문한다고 해서 달라진 양동마을의 모습도 궁금했고또 멀리서 찾아주신 분에 대해서

포항사람도 아니고 경주 사람도 아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배려... 그것이 인간적인 도리라 생각해서 안내도 할겸 양동 마을을 찾았습니다.

 

계를 보니 약속시간은 제법 남아 있었지만 해맞이를 보러온 관관객들이 일시에 빠져나가기 시작하면 교통이 막힐것을 염려해서 미리 출발을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차가 막히지 않아 약1시간정도 먼저 도착해서

이곳 저곳을 둘러볼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입구에서부터 도로를 점령한 승용차들과 휴일을 맞아 찾아온 수많은 인파들이 북적이고 그누구 한사람 이 혼란스러움을 통제하는

최소한의 모습조차도 볼수없는 미리 예견된 모습들을 보았습니다.

더이상 실망스런 모습에 양동마을의 1년후의 모습이 머리속에 그려져

혼란스러웠습니다.

박씨아저씨의 머리속에 떠오른 문구가 바로 '경주 양동마을 지정1년만에 유네스코문화유산 등재 취소되다~' 였습니다.

과연 어떤 모습인지...

양동마을 입구에 세워진 석구조물이 유네스코 지정이후에 달라진 모습중하나입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제일먼저 관광해설사의 집을 찾았습니다. 과연 양동마을에 대한 안내 자료나 안내를 받을수 있을지...

가끔 휴일 유적지를 찾을경우 해설사님이 안계시고 팜플랫조차 구할수 없는곳을 보았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먼저 찾아가보았습니다.

아무래도 유네스코지정유산인 양동마을에는 그런일이 없겠죠? 또 있어서도 안되겠죠?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옛말은 여기서도...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서 코가 막히고 귀가 막히고...이제 눈까지 막히려고 합니다.

관광해설사의 집에서는 '향단'의 모습이 보이지 않은 모양입니다.

혹시나 싶어 팜플랫은 비치가 되었을까! 하고 찾아보았지만 팜플렛도 구할수 없었습니다.

굳게 닫혀진 창문에 친절하게 1월은 쉽니다.2월7일부터 안내합니다.

이날 아마도 이 문구를 보신분들이 줄잡아서 500여분은 넘을듯 합니다.

박씨아저씨가 도착한 시간이 12시가 조금 안된 시간이었는데 관광객들의 숫자를 대충 추산해보니(대형버스5대:200분,승용차 100여대:300분)

어림잡아 500여분정도 추정을 했습니다.

과연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지 5개월 만에 양동마을에는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너무나 혼란스러워 마을 정보화센터에서 혼자 동분서주 하시는 마을이장(이지관)님을 만나서 무엇이 문제인지?

그리고 관리를 담당하는 경주시청 공무원분들은 왜 이렇게 방치하다시피 하고 있는지를 여쭈어 보았습니다.

아래 내용은 박씨아저씨와 마을이장님과의 일문일답을 요점만 정리해서 적어 보았습니다.

문:유네스코 지정이후 관광객들의 숫자는 증가했습니까?

답: 네~ 일일 평일에도 400여명 정도 주말이나 공휴일의 경우 1,300명 정도가 찾아주고 계십니다.

문: 관광 해설사의 집에 안내자가 없고 2월7일부터 안내한다고 되어있고 안내 팜플랫도 비치되어 있지 않은데 그이유는?

답: 계약기간이 만료되었고 또 1년에 10개월이상은 근무할수 없는 조건때문에 그렇다.팜플랫도 비치가 되었으나 너무나 부족하다.

문: 경주시의 공무원들이 유네스코에 등재시킨다고 수고했는데 왜 등재되고 나서 관리는 안되는지?그리고 그 담당부서는?

답: 지정 이후에 담당공무원들도 늘었고 직원도 늘었다.담당은 경주시문화제관리계에서 업무를 보고있는데 좀 답답하다~(특히 문화제보호법때문에...)

문: 그럼 경주시에 이러한 어려움이나 문제점들을 건의해 보았는가? 마지막으로 하실말씀은?

답: 한마디로 소귀에 경읽기~다. 무슨 법(문화제보호법)이 그렇게 까다롭고 복잡한지... 그리고 이마을은 대대로 조상들이 물려준 터전위에서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문화와 함께 공존하는곳이다 마을주민에게도 피해가 주어지지않고 함께 공생할수 있는 방편을 찾아야 하는데 아쉽다.

현재 시소유인 마을회관 건물을 생활체험관으로 사용할수 있게 해주었으면 좋겠고 또 찾아오시는 관광객분들도 주민들에게 피해가 가지않은 기본적인

소양을 길러주었으면 하는바램이다.

 

※상기 인터부는 작년 12월부로 양동마을 이장님직에서 물러나신 이지관님의 협조로 작성되었으며 간단하게 문답형식으로 정리했습니다.

 

약 30여분정도 이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는동안에도 마을회관으로 많은 관광객분들이 궁금한점을 여쭈어 보시고 팜플랫을 구하려고 마을회관을 찾으셨습니다.

아마도 이날 양동마을을 찾으신분들이 어림잡아 최소한 1000여분은 넘게 다녀가셨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중 제대로 안내를 받으면서 양동마을을 둘러보신분들은 단 한분도 없었을듯합니다.

마을이장님과 이야기를 마치고 잠시후 찾아주신분과 함께 몇곳을 둘러보았지만 빛장이 채워진 문앞에서 더이상 양동마을의 옛추억은 찾아볼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박씨아저씨는 유네스코문화유산에 등재되기전 양동마을을 답사했기에 많은 사진들이 남아 있어 이전의 양동마을 모습들을 올려봅니다.

궁금하신분들은 '더보기'를 클릭하시면 옛날 양동마을의 모습을 감상하실수 있습니다.

더보기

천년고도 경주에서 조선시대 삶의 숨길을 느끼보세요.

 5월3일 어린이날을 앞두고 가족들과 함께 무작정 포항으로 여행을 떠나 경상북도 수목원을 들러서 포항 칠포 해수욕장 부근에서 1박을 하고 대구로 돌아오는길,5월4일 아침 그냥 대구 포항간 고속도로에 바로 올려 돌아오기는 못내 아쉽고 함께간 동서네도 아이들에게 또다른 추억을 만들어주자고 하길래

가까운 경주로 차를 몰았다.포항을 벗어날 무렵 '경주양동마을' 이야기가 나왔고 오래전 한번 들렀던 기억이 있어 경주 박물관행을 포기하고 양동마을로 차를 몰았다.

른 형산강 줄기가 마지막숨을 몰아쉬며 달려와 잠시 안식하며 너른 경주의 양동벌을 적셔주고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몸부림치듯 바다와 만나는 그곳 경주 양동마을,설창산 을 주봉으로두고  (物)자 모양으로 뻗어내린 세구릉과 계곡 사이에 자리하고 있어 예로부터 유명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대표적으로 조선시대 청백리로 이름난 우재(愚齋)손중돈과 성리학자 회재(晦齋) 이언적을 들수있다. 상세보기는 '더보기'를...

본관은 경주. 자는 대발(大發), 호는 우재(愚齋). 아버지는 계천군(鷄川君) 소(昭)이다. 김종직 문하에서 배웠다. 1489년(성종 20)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예문관봉교를 거쳐 관리들을 감찰하는 청환직(淸宦職)을 여러 차례 역임했다. 1497년(연산군 3) 양산군수를 거쳐 사예·사복시정에 올랐는데, 연산군의 횡포를 지적하던 간관(諫官)들이 쫓겨날 때 함께 파직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 직후 상주목사로 임명되었는데, 선정을 베풀어 1509년(중종 4) 표리(表裡) 1습(襲)을 하사받고 좌승지로 승진했다. 이어 공조·예조 참판을 역임했으며, 1517년에는 성절사(聖節使)로 명에 갔다. 뒤에 공조판서·이조판서·세자시강원빈객을 거친 후, 도승지·대사간을 지냈으며 이어 경상도·전라도·충청도·함경도의 관찰사를 지내고 우참찬에 이르렀다. 경주 동강서원(東江書院), 상주 속수서원(涑水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경절(景節)이다.

 

이언적 (조선 성리학자)  [李彦迪]1491(성종 22) 경북 경주~1553(명종 8)

이언적의 글씨 /이언적의 글씨, 〈근묵〉에서, 성균관대학교 ...
성리학의 이설(理說)을 정립하여 이황(李滉)의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본관은 여주(驪州). 초명은 적(迪).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사마방목 /사마방목, 1513년 사마시 합격자 ...
아버지는 생원 번(蕃)이며, 어머니는 계천군(鷄川君) 소(昭)의 딸로 경주손씨(慶州孫氏)이다. 10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외숙인 손중돈(孫仲暾)의 도움으로 생활하며 그에게 배웠다.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하여 경주 주학교관(州學敎官)이 되었다. 이후 성균관전적·인동현감·사헌부지평·이조정랑·사헌부장령 등을 역임했다. 1530년 사간(司諫)으로 있을 때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그들 일당에 의해 몰려 향리인 경주 자옥산(紫玉山)에 은거하며 학문에 열중했다. 1537년 김안로 일파가 몰락하자 종부시첨정으로 시강관에 겸직발령되고, 교리·응교 등을 거쳐, 1539년에 전주부윤이 되었다. 이후 이조·예조·병조의 판서를 거쳐 경상도관찰사·한성부판윤이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 인종이 죽자 좌찬성으로 원상(院相)이 되어 국사를 관장했고, 명종이 즉위하자 〈서계 10조 書啓十條〉를 올렸다. 이해 윤원형(尹元衡)이 주도한 을사사화의 추관(推官)으로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1547년 윤원형과 이기(李芑) 일파가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어 죽었다.상기자료는DAUM백과사전에서 발췌함.

 

리들이 도착한 경주 양동마을은 마을전체가 중요 민속자료 제19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국보1점,보물4점,중요민속자요13점,경상북도유형문화재2점,경상북도기념물 1점등이 있으며 조선시대 양반들의 가옥과 더불어 평민들의 삶이 잘 보존되어있고 현재도 주민들이 살아가고 있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유적지이며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목표로 위원회를 구성 추진중이며 결과는 2010년 7월 위원회에서 결정이 난다고 합니다. 

좋은결과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먼저 안내소 입구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전에 보았던 기억을 더듬어 걸으면서 마을전체를 둘러볼 요량으로 안내소에 들러

팜플랫을 챙기고 마을 탐방을 시작했습니다.지면관계상 전체적으로 소개는 해드리지 못하고 보물3점외 주요민속자료 몇점만을 사진과 함께 설명하겠습니다.

내소에서 가까워서 제일 먼저 들러본 '심수정'의 전경입니다.정자 주변에 아름드리 고목들이 고색창연한 정자와 함께 오랜세월의 역사를 말해주는듯 합니다.이정자는 농재 이언괄을 추모하여 명종15년(1560)에 건립되었으나 철종때 화재로 소실되고1917년 다시 현재의 모습으로 지어졌으며 이언괄은 회재(晦齋) 이언적의 친동생으로 벼슬에 있는 형을 대신하여 노부모를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

 

정자에 올라 앞쪽을 바라보면 언덕너머로 (이언적) 집인 '향단'이 올려다 보인다.

 

'심수정' 언덕에서 내려본 전경.멀리 사진 왼쪽으로 향단이 보인다.'향단'은 나중에 설명하기로 하겠습니다.

다른곳도 돌아보고 내려오는길에 어차피 '향단'들러야 하니 조금 서둘러야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요.

곳 저곳을 살펴 보다가 고갯길에서 할머니 한분을 만났습니다. 고갯길을 다 올라야 집에 도착하시는데,양손에 든 식료품이 엄청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할머니 저기 위에 사시는 모양이죠? 좋으시겠습니다"

"좋기는 뭐가 좋아요 힘들어 죽겠는데~"

"ㅎㅎㅎ양반은 아무나 하는게 아닌 모양입니다"

양손 가득 비닐 봉다리에 식료품을 들고 3번을 쉬시면서 집까지 올라가셨는데...

도와드리고 싶은마음 굴뚝어었지만 낯선 이방인이 할머니의 삶속에 끼어드는것이 어쩌면 불편하실듯해서 그냥 두었습니다.

 조금전 만났던 할머니 집(수졸당)에서 내려다본 마을 풍경입니다.시원하게 전경이 내려다보이네요.

이럴때는 양반이 좋을듯한데...매일 힘겹게 고개를 오르시려면 양반 아무나 하는게 아니라는 생각 지울수 없네요^^

수졸당:1979년 1월 23일 중요민속자료제78호로 지정되었으며 1620년(광해군12)에 회재() 이언적()의 4대손 이의잠()이 건립하였고, 그후 6대손 이정계가 증축하였다. 수졸당이라는 당호()는 이의잠의 호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ㄱ자형의 안채와 자형의 사랑채·대문채·아래채가 근접하여 일곽을 이룬 튼자형을 이루고 있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향좌단에 정면 2칸, 측면 2칸의 대청을 두고, 옆에 정면 2칸, 측면 1.5칸의 방을 둔 후 앞에 반 칸 너비의 툇마루를 두었다. 사랑방 우측에 바로 2칸의 대문간이 있다.
안채는 서측 꺾임부에 부엌을 두고 동측으로 안방 2칸, 대청 2칸, 건넌방 1칸을 차례로 배열하여 정면 6칸이 되었다. 부엌 북측 아래쪽으로는 방, 찬광, 광이 각 1칸씩이고 반칸의 안변소가 연이어 있다. 아래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인데 어칸이 안대문이고, 북쪽 2칸은 광이고 남쪽 2칸은 외양간과 방앗간이다. 안채 뒷쪽 서남측 동산에는 사당 3칸이 있다. 이언적의 14대손 이종환()이 소유·관리하고 있다.이 자료는 팜플랫과 인터넷 검색에서 찾은 자료를 재구성 하였습니다.

 

금전 만났던 유명(?)하신 할머니와 이별을 고하고 함께 다니던 가족들은 벌써 더위에 지쳐버려 길옆 그늘을 찾아서 잠시 쉬는동안 홀로 보물을 만나러

가보았습니다. 300M라는 안내표시만 보고 찾아간 무첨당(보물제411호)의 모습에 힘이 쭈욱 빠져 버렸습니다.흙먼지 폴폴 날리는 시골길을 뙤약볕아래

오로지 보물 찾겠다는 일념하에 찾았는데 많이 아쉬웠습니다.미리 안내 표지판을 설치해서 관람객들에게 조그만 배려를 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다음번에 찾을때는 제대로 보수되어 보물로서의 위용를 드러낼것을 기대하면서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 진짜 보물(향단)을 찾으로 향했습니다.

위에 지친 집사람과 아이들은 안내소옆에서 아이스크림으로 더위를 시킬동안 혼자서 오로지 보물을 보기위해서 안내소 맞은편에 보이는 '향단'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향단에 대해 잠시 설명드리자면 서두에 말씀드렸던 회재(晦齋) 이언적이 경상감사로 재직시 모친의 병간호를 할수 있도록 중종(中宗)이 지어준 건물이라고 합니다.향단의 상세한 설명은 더보기를 클릭하시길...

 

건물의 큰 특징으로 조선시대 최상층 양반가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건물전체의 기둥을 원형으로 만들어 졌으며 원래 99칸이었으나 일부는 소실되고 현재 56칸이 남아있다.조선시대 건축물중 일반 사가(私家)로서 지을수 있는 최대 크기가 99칸이었다는 점(임금만 100칸이상을 지을수 있었음)을 감안 한다면 회재(晦齋) 이언적을 중종이 얼마나 신임했는지 엿볼수 있는 대목이며 1칸의 크기가 요즘 단위로 환산하면 1.8m정도되는데, 99칸이면 건물의 규모는 가히 상상이되시죠? 사진에 보이는 곳이 향단 으로 들어가는 대문입니다.언덕위에 높게 우뚝서있는 솟을대문양식으로 그위용을 자랑하고 있네요.

솟을대문을 들어서서 좌측으로 보이는 긴건물이 눈에 들어온다.얼핏보아도 손님접대 및 다용도로 쓰였던 건물처럼 보인다 여러개의 방과 사이에 부엌기능을 할수있는 공간도 보인다.눈에 띄는점은 기둥이 모두 4각형이 아닌 원형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솟을대문을 통과해서 마당을 지나면 다시 출입문이 나온다.

집안 내부에 있는 솟을대문(단순하면서도 간결하게 장식이 이루어져 있다.)

상부의 장식은 서원건물의 외살문이나 내살문 등에 장식으로 사용하던 기법을 그대로 적용시켜 놓았다.

 

 요즘으로 치면 거실의 역활을 하던 대청마루 중간기둥의 색깔이 다르다.아마도 오랜세월의 무계를 이기지 못해 교체의 흔적이 역력하다.

자세히 보니 군데군데 그런 흔적들이 보이는데 마무리가 깔끔하지 못한것이 눈에 거슬린다.

 

사랑채,안채,행랑체로 이어진 '튼ㅁ자형' 의 독특한 구조로 4면이 연결된 지붕사이로 파아란 하늘이 돋보인다.숫기와와 암기와의 연결로 절묘한 배수처리

의 기법도 돋보이는 부분이다.

 마당 앞쪽으로 보이는 손님을 접대하고 휴식을 겸한 공간이다.여기에는 특이하게 4각형기둥과 원형기둥을 함께 사용한것이 이채롭다.

향단 (香壇)에서 내려다본 '심수정'과 이웃 건물들,그의 아우가 머물렀던 '심수정'이 손에 잡힐듯 가까이보인다.

향단에서의 보물에 대한 아쉬움을 해갈하고, 마지막 보물을 찾아 향한곳이 '우재(愚齋)손중돈' 이 분가하여 살았던 관가정(觀稼亭).관가정(觀稼亭)앞에도착하니 우뚝솟은 거대한 2그루의 은행나무가 나를 반긴다.어림잡아도 수령이 몇백년은 넘어 보인다.요즘 여기 저기 싸돌아 다니다 보니 대충 어림잡아도 300백년 이상은 될듯한데 별도의 안내판이나 설명서가 없어서 짐작으로만 상상할뿐 아쉬움이 남는다.

관가정(觀稼亭)앞의 노거수(은행나무)

관가정으로 통하는 일각대문 1981년 보수를 하면서 세운 관가정의 출입구이다.

관가정((觀稼亭)

보물 제 144호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150 

 

일각대문을 통과해서 좌측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관가정(觀稼亭)이란 현판글씨가 걸려있는 누마루와 수령을 짐작하기 어려운 향나무가 보인다.

관가정의 특징중에 특이한점은 보통 한옥의 경우 대문옆에 행랑채를 두고 안채와 분리를 시키는데 관가정에는 대문 왼쪽에 사랑방과 마루를 두었다.

정자 옆에 자라고 있는 수령을 알수없는 누운향나무 아마도 500년 이상은 될듯해보이는데,아마 '관가정'의 역사를 말하고 있는지도... 이상으로 신라천년의 고도에서 찾은 조선시대 중기 양반가옥과 평민들의 삶이 어울어져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여 아름답게 살아가는 경주 양동마을 답사기를 마칩니다.

 문화재보다 개인의 이득이 우선시 될수는 없는것입니다.

그렇다고 개인이 희생되어서도 안됩니다.

과연 함께 공존할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각종 간판들...눈에 거슬립니다.정비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동네 부녀회에서 떡치는모습을 재현해서 인절미를 팔고 계셨습니다.

예전에 순천을 방문했을때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부녀회에서 나와서 관람객들에게 따뜻한 차한잔을 건내면서

반겨주시던 그모습이 왜그리도 떠오르는지...

순천여행을 다녀온지 2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뇌리속에 순천이 따뜻하게 느껴지는것은 비단 따끈한 커피한잔 때문만은 아닐것입니다.

 

가계에서 버려진 쓰레기들... 어묵박스도 보이고 물병도 보이고...

세계문화유산 등재후 5개월이 지난 양동마을의 현주소는 아닌지...

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고 기뻐하고 환호했던 순간이 불과 5개월전에 일입니다. 등재되기 이전에도 보존이냐 개발이냐 개인의 사유재산침해와  문화재 보호 등 말들이 많았었고 해결해야할 숙제들이 많았습니다.

이제 양동마을은 양동마을 개인의 문제가 아닌 대한민국 그리고 세계적인 문화도시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어야 할때입니다. 현대와 과거가 공존하는 양동마을

그리고 개인과 문화재가 공존하며 공생할수 있는 멋진 양동마을로 거듭나길 빌면서...박씨아저씨의 단소리 쓴소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