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된 양동마을은 어떤곳인가?

2010. 8. 5. 07:51바람따라 물따라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를 축하합니다.

이글은 2009년 5월 가족들과 함께 경주 양동마을을 방문해서 쓴글입니다. 몇일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고 예전글을 다시한번 올려봅니다.함께 감상해보시길...

 

른 형산강 줄기가 마지막숨을 몰아쉬며 달려와 잠시 안식하며 너른 경주의 양동벌을 적셔주고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몸부림치듯 바다와 만나는 그곳 경주 양동마을,설창산 을 주봉으로두고  (物)자 모양으로 뻗어내린 세구릉과 계곡 사이에 자리하고 있어 예로부터 유명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대표적으로 조선시대 청백리로 이름난 우재(愚齋)손중돈과 성리학자 회재(晦齋) 이언적을 들수있다. 상세보기는 '더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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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중돈 (조선 문신)  [孫仲暾]1463(세조 9)~1529(중종 24)

본관은 경주. 자는 대발(大發), 호는 우재(愚齋). 아버지는 계천군(鷄川君) 소(昭)이다. 김종직 문하에서 배웠다. 1489년(성종 20)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예문관봉교를 거쳐 관리들을 감찰하는 청환직(淸宦職)을 여러 차례 역임했다. 1497년(연산군 3) 양산군수를 거쳐 사예·사복시정에 올랐는데, 연산군의 횡포를 지적하던 간관(諫官)들이 쫓겨날 때 함께 파직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 직후 상주목사로 임명되었는데, 선정을 베풀어 1509년(중종 4) 표리(表裡) 1습(襲)을 하사받고 좌승지로 승진했다. 이어 공조·예조 참판을 역임했으며, 1517년에는 성절사(聖節使)로 명에 갔다. 뒤에 공조판서·이조판서·세자시강원빈객을 거친 후, 도승지·대사간을 지냈으며 이어 경상도·전라도·충청도·함경도의 관찰사를 지내고 우참찬에 이르렀다. 경주 동강서원(東江書院), 상주 속수서원(涑水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경절(景節)이다.

 

이언적 (조선 성리학자)  [李彦迪]1491(성종 22) 경북 경주~1553(명종 8)

이언적의 글씨 /이언적의 글씨, 〈근묵〉에서, 성균관대학교 ...
성리학의 이설(理說)을 정립하여 이황(李滉)의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본관은 여주(驪州). 초명은 적(迪).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사마방목 /사마방목, 1513년 사마시 합격자 ...
아버지는 생원 번(蕃)이며, 어머니는 계천군(鷄川君) 소(昭)의 딸로 경주손씨(慶州孫氏)이다. 10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외숙인 손중돈(孫仲暾)의 도움으로 생활하며 그에게 배웠다.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하여 경주 주학교관(州學敎官)이 되었다. 이후 성균관전적·인동현감·사헌부지평·이조정랑·사헌부장령 등을 역임했다. 1530년 사간(司諫)으로 있을 때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그들 일당에 의해 몰려 향리인 경주 자옥산(紫玉山)에 은거하며 학문에 열중했다. 1537년 김안로 일파가 몰락하자 종부시첨정으로 시강관에 겸직발령되고, 교리·응교 등을 거쳐, 1539년에 전주부윤이 되었다. 이후 이조·예조·병조의 판서를 거쳐 경상도관찰사·한성부판윤이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 인종이 죽자 좌찬성으로 원상(院相)이 되어 국사를 관장했고, 명종이 즉위하자 〈서계 10조 書啓十條〉를 올렸다. 이해 윤원형(尹元衡)이 주도한 을사사화의 추관(推官)으로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1547년 윤원형과 이기(李芑) 일파가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어 죽었다.상기자료는DAUM백과사전에서 발췌함.

 

리들이 도착한 경주 양동마을은 마을전체가 중요 민속자료 제19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국보1점,보물4점,중요민속자요13점,경상북도유형문화재2점,경상북도기념물 1점등이 있으며 조선시대 양반들의 가옥과 더불어 평민들의 삶이 잘 보존되어있고 현재도 주민들이 살아가고 있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유적지이며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목표로 위원회를 구성 추진중이며 결과는 2010년 7월 위원회에서 결정 이 난다고 합니다. 

좋은결과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먼저 안내소 입구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전에 보았던 기억을 더듬어 걸으면서 마을전체를 둘러볼 요량으로 안내소에 들러

팜플랫을 챙기고 마을 탐방을 시작했습니다.지면관계상 전체적으로 소개는 해드리지 못하고 보물3점외 주요민속자료 몇점만을 사진과 함께 설명하겠습니다.

내소에서 가까워서 제일 먼저 들러본 '심수정'의 전경입니다.정자 주변에 아름드리 고목들이 고색창연한 정자와 함께 오랜세월의 역사를 말해주는듯 합니다.이정자는 농재 이언괄을 추모하여 명종15년(1560)에 건립되었으나 철종때 화재로 소실되고1917년 다시 현재의 모습으로 지어졌으며 이언괄은 회재(晦齋) 이언적의 친동생으로 벼슬에 있는 형을 대신하여 노부모를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

 

정자에 올라 앞쪽을 바라보면 언덕너머로 (이언적) 집인 '향단'이 올려다 보인다.

'심수정' 언덕에서 내려본 전경.멀리 사진 왼쪽으로 향단이 보인다.'향단'은 나중에 설명하기로 하겠습니다.

다른곳도 돌아보고 내려오는길에 어차피 '향단'들러야 하니 조금 서둘러야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요.

곳 저곳을 살펴 보다가 고갯길에서 할머니 한분을 만났습니다. 고갯길을 다 올라야 집에 도착하시는데,양손에 든 식료품이 엄청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할머니 저기 위에 사시는 모양이죠? 좋으시겠습니다"

"좋기는 뭐가 좋아요 힘들어 죽겠는데~"

"ㅎㅎㅎ양반은 아무나 하는게 아닌 모양입니다"

양손 가득 비닐 봉다리에 식료품을 들고 3번을 쉬시면서 집까지 올라가셨는데...

도와드리고 싶은마음 굴뚝어었지만 낯선 이방인이 할머니의 삶속에 끼어드는것이 어쩌면 불편하실듯해서 그냥 두었습니다.

 조금전 만났던 할머니 집(수졸당)에서 내려다본 마을 풍경입니다.시원하게 전경이 내려다보이네요.

이럴때는 양반이 좋을듯한데...매일 힘겹게 고개를 오르시려면 양반 아무나 하는게 아니라는 생각 지울수 없네요^^

수졸당:1979년 1월 23일 중요민속자료제78호로 지정되었으며 1620년(광해군12)에 회재() 이언적()의 4대손 이의잠()이 건립하였고, 그후 6대손 이정계가 증축하였다. 수졸당이라는 당호()는 이의잠의 호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ㄱ자형의 안채와 자형의 사랑채·대문채·아래채가 근접하여 일곽을 이룬 튼자형을 이루고 있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향좌단에 정면 2칸, 측면 2칸의 대청을 두고, 옆에 정면 2칸, 측면 1.5칸의 방을 둔 후 앞에 반 칸 너비의 툇마루를 두었다. 사랑방 우측에 바로 2칸의 대문간이 있다.
안채는 서측 꺾임부에 부엌을 두고 동측으로 안방 2칸, 대청 2칸, 건넌방 1칸을 차례로 배열하여 정면 6칸이 되었다. 부엌 북측 아래쪽으로는 방, 찬광, 광이 각 1칸씩이고 반칸의 안변소가 연이어 있다. 아래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인데 어칸이 안대문이고, 북쪽 2칸은 광이고 남쪽 2칸은 외양간과 방앗간이다. 안채 뒷쪽 서남측 동산에는 사당 3칸이 있다. 이언적의 14대손 이종환()이 소유·관리하고 있다.이 자료는 팜플랫과 인터넷 검색에서 찾은 자료를 재구성 하였습니다.

 

금전 만났던 유명(?)하신 할머니와 이별을 고하고 함께 다니던 가족들은 벌써 더위에 지쳐버려 길옆 그늘을 찾아서 잠시 쉬는동안 홀로 보물을 만나러

가보았습니다. 300M라는 안내표시만 보고 찾아간 무첨당(보물제411호)의 모습에 힘이 쭈욱 빠져 버렸습니다.흙먼지 폴폴 날리는 시골길을 뙤약볕아래

오로지 보물 찾겠다는 일념하에 찾았는데 많이 아쉬웠습니다.미리 안내 표지판을 설치해서 관람객들에게 조그만 배려를 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다음번에 찾을때는 제대로 보수되어 보물로서의 위용를 드러낼것을 기대하면서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 진짜 보물(향단)을 찾으로 향했습니다.

위에 지친 집사람과 아이들은 안내소옆에서 아이스크림으로 더위를 시킬동안 혼자서 오로지 보물을 보기위해서 안내소 맞은편에 보이는 '향단'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향단에 대해 잠시 설명드리자면 서두에 말씀드렸던 회재(晦齋) 이언적이 경상감사로 재직시 모친의 병간호를 할수 있도록 중종(中宗)이 지어준 건물이라고 합니다.향단의 상세한 설명은 더보기를 클릭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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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단 (香壇)

보물 제412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135 

향단(香壇)은 1540년대에 이언적(李彦迪)[1491~1553]이 동생인 이언괄을 위해 지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향단은 손씨와 이씨, 두 가문이 모여 살던 양동 마을에 위치해 있다. (경주 양동마을의 안내 책자에는 중종이 지어준 것으로 되어있다.)
향단은 아주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가옥 전체를 볼 때 향단은 본체와 별체로 구분할 수 있다. 이중 본체 부분이 아주 특별하다. 본체는 가운데 안방을 포함한 일련의 방들이 들어서 있고 커다란 ㅁ자 건물이 외곽을 둘러싸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ㅁ자 건물 안에는 여러 개의 방들이 들어서 있다. 큰 사랑방을 포함한 일련의 방들은 ㅁ자 건물 중 바깥쪽 한 면에 들어서 있다. 그 위치가 비교적 바깥쪽이며 그 앞에는 커다란 뜰이 있다. 그래서 안채는 본체 깊숙한 안쪽에 은신한 채로 있는 반면 사랑채는 비교적 바깥쪽에 노출이 된 채로 놓여 있는 집이라고 할 수 있다.
향단에서 주목할 만한 점 한 가지는 방들의 성격이다. 여느 다른 전통 가옥과 마찬가지로 향단 역시 여러 개의 방들이 있다. 그리고 이들 방들의 성격이 조금씩 다르다. 즉 방이 가진 여건에 따라 장소의 특성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향단에는 사랑방이 두 개 있다. 하나는 큰 사랑, 다른 하나는 작은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큰 사랑은 중년이 된 가장이, 작은 사랑에서는 소년의 아들이 기거하는 상황을 가정해 볼 수 있다. 혹은 큰 사랑에서는 노인의 할아버지, 작은 사랑에서는 중년이 된 아버지가 기거하는 것 또한 가능한 상황이다.
이 두 개의 방은 같은 사랑방이면서도 그 성격이 부분적으로 많이 다르다. 먼저 큰 사랑은 뒤쪽에 뜰이 있다. 이 뜰은 외부와 연결되지 않은 매우 개인적인 뜰이다. 그리고 그 쪽으로 큰 사랑방의 창문, 출입문 등 개구부가 나 있다. 그래서 뒤뜰을 내다 볼 수도 있고 직접 나갈 수도 있게 되어 있다. 창문 앞에는 툇마루가 붙어 있어 그곳에 걸터앉을 수 있다. 이런 조건과 함께 큰 사랑이 대문 등의 외부출입구를 기준으로 볼 때 비교적 안쪽에 놓여 있는 조건을 같이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되면 큰사랑은 제법 개인적인 생활이 보장되어진다고 할 수 있다.
큰사랑은 개인적인 성격은 물론 공공적인 성격도 함께 가진다. 비록 거리는 멀지만 이 방의 한 면은 외부 출입문과 면해 있다. 그리고 그 쪽 면에 개구부가 있다. 그래서 일정 부분의 노출을 피할 수 없다. 큰 사랑의 다른 한 면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의 구조로 되어 있다. 방의 한 면이 대청과 면하고 있고 그 쪽에 개구부가 있다. 대청은 지붕으로 덮여 있어 내부이긴 하지만, 동시에 벽이 없기 때문에 외부에 열려 있는 게 된다. 그만큼 외부에 노출된다고할 수 있다. 대청은 또한 방문객이 경유하는 현관 구실을 하는 곳이다. 이것 또한 큰 사랑이 노출되는 조건 중의 하나이다. 이런 면을 종합해서 본다면 큰 사랑이 결코 개인적인 공간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으며 동시에 공공성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안방 등과 같이 건물 안쪽에 있는 방들과 비교하면 더욱 그러하다.
아래에 있는 작은 사랑은 대문에 아주 가깝게 놓여 있다. 또한 중문과는 가까이서 서로 마주 대하고 있다. 그리고 양쪽 모두에 개구부를 가지고 있다. 큰 사랑처럼 개인적인 뜰과 면하고 있지도 않다. 그래서 큰사랑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개인적인 생활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비교적 공공적인 곳이다.
큰 사랑과 작은 사랑 사이에는 커다란 대청이 있다. 이 곳 대청에는 문짝이 달린 벽이 가로 놓여진다. 그러면서 대청은 두 개의 공간으로 쪼개진다. 이런 분할 덕에 대청에는 아주 독특한 성격을 가진 장소 하나가 더 생기게 된다. 이 벽이 생긴 이유는 사랑 영역과 안채 영역을 서로 통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벽이 없는 경우 사랑채 마당 혹은 대청에서 안채 쪽이 훤히 보이게 되어 있다. 이 벽이 이런 시선을 가로막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둘로 나누어진 것 중 안채 쪽에 만들어지는 좁은 마루이다. 이 마루는 양쪽에 있는 방을 서로 연결하고 있다. 안채 쪽에서 오는 사람을 맞이하고 받아들이는 역할도 한다. 식사를 제공한다거나 할 때 이용하는 것도 그 역할에 포함된다. 이런 역할들은 대체적으로 사적이다. 즉 이 마루는 이런 사적인 생활을 보장해주는 마루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벽 반대편에 있는 큰 마루가 대외적이라고 한다면 그에 비해 안쪽 툇마루는 대내적이라고 할 수 있다.
향단에 있는 큰 사랑방과 작은 사랑방은 집안에 있는 다른 방들에 비해 개방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 저항 없이 바깥에 온전히 열려 있는, 그런 개방으로 볼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사랑채를 집 바깥으로부터 떨어지게 만드는 장소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채와 집 바깥, 그 사이에는 대문이 있고, 중문이 하나 더 있으며 높은 단이 가로막고 있다. 이들이 바로 사랑채가 바깥에 직접 노출되지 않도록 하고 있다. 이런 장소 덕에 사랑채는 은밀함까지를 같이 포함하게 된다.
향단의 안채는 큰 안방과 작은 안방, 둘로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가운데 대청을 두고 방 끝 모서리를 맞대고 있는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큰 방에는 시어머니, 작은 방에는 며느리가 거처하는 상황이 있을 수 있다. 또한 큰 방에는 중년의 어머니, 작은 방에는 소녀인 딸이 거처하는 상황도 있을 수 있다. 생긴 모습만 본다면 이 둘은 아주 유사하다. 하지만 그 성격은 다소 차이가 있다.
집 전체로 볼 때 이 큰 안방의 위치는 중앙이다. 그리고 주변의 거의 모든 방향으로 문이 나 있어 서로 통한다. 가운데에 있으면서 주변에 있는 것들 모두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중심적인 성격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작은 안방에서 확인하기는 어려운 성격이다.
안채에 있는 대청마루 역시 중심적인 성격을 가진다. 하지만 그 내용은 안방과는 조금 다르다. 크게 보면 이 마루는 집안의 많은 장소들과 면해 있다. 그리고 그곳에 출입구가 있다.
안마당과 면해 있고 그 쪽으로 통하는 출입구가 있다. 옆쪽에 있는 부엌과 관련된 장소들과도 면해 있고 출입구가 있다. 중문 밖과도 면해 있고 그곳에도 출입구가 있다. 이 중문 밖은 사랑채 마당과 연결된다. 여기에다 두 개의 방들과 면해 있고 또 출입구가 있으니, 이 마루는 집안의 거의 모든 곳에서 접근할 수 있는 곳이 된다. 즉 이 마루가 집안의 거의 모든 곳과 연결되는, 다른 말로는 집안의 거의 모든 곳으로부터 모여들 수 있는 소위 중심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안채에 있는 대청은 다른 전통가옥에서 보기 힘든 아주 독특한 성격 한 가지를 가지고 있다. 이 대청이 놓여진 건물은 앞 건물보다 꽤 높이 올려져 있다. 그래서 대청 바닥이 앞 건물 지붕 중간쯤에 걸리게 되어 있다. 앞 건물이 대청이 있는 건물을 완전히 가리는 것이 아니라 반 쯤 가리고 있는 것이 된다. 그래서, 대청에 서면 앞 건물너머로 바깥세상이 보이게 되어 있다. 이것 때문에 안채는 더 이상 안에 갇힌, 폐쇄적인 곳으로 보기 어려워진다. 즉 안채의 폐쇄성을 상쇄시켜 주는 그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마루가 되는 것이다.이 자료는 다음백과사전에서 발췌함.

건물의 큰 특징으로 조선시대 최상층 양반가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건물전체의 기둥을 원형으로 만들어 졌으며 원래 99칸이었으나 일부는 소실되고 현재 56칸이 남아있다.조선시대 건축물중 일반 사가(私家)로서 지을수 있는 최대 크기가 99칸이었다는 점(임금만 100칸이상을 지을수 있었음)을 감안 한다면 회재(晦齋) 이언적을 중종이 얼마나 신임했는지 엿볼수 있는 대목이며 1칸의 크기가 요즘 단위로 환산하면 1.8m정도되는데, 99칸이면 건물의 규모는 가히 상상이되시죠? 사진에 보이는 곳이 향단 으로 들어가는 대문입니다.언덕위에 높게 우뚝서있는 솟을대문양식으로 그위용을 자랑하고 있네요.

솟을대문을 들어서서 좌측으로 보이는 긴건물이 눈에 들어온다.얼핏보아도 손님접대 및 다용도로 쓰였던 건물처럼 보인다 여러개의 방과 사이에 부엌기능을 할수있는 공간도 보인다.눈에 띄는점은 기둥이 모두 4각형이 아닌 원형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솟을대문을 통과해서 마당을 지나면 다시 출입문이 나온다.

집안 내부에 있는 솟을대문(단순하면서도 간결하게 장식이 이루어져 있다.)

상부의 장식은 서원건물의 외살문이나 내살문 등에 장식으로 사용하던 기법을 그대로 적용시켜 놓았다.

 요즘으로 치면 거실의 역활을 하던 대청마루 중간기둥의 색깔이 다르다.아마도 오랜세월의 무계를 이기지 못해 교체의 흔적이 역력하다.

자세히 보니 군데군데 그런 흔적들이 보이는데 마무리가 깔끔하지 못한것이 눈에 거슬린다.

사랑채,안채,행랑체로 이어진 '튼ㅁ자형' 의 독특한 구조로 4면이 연결된 지붕사이로 파아란 하늘이 돋보인다.숫기와와 암기와의 연결로 절묘한 배수처리

의 기법도 돋보이는 부분이다.

 마당 앞쪽으로 보이는 손님을 접대하고 휴식을 겸한 공간이다.여기에는 특이하게 4각형기둥과 원형기둥을 함께 사용한것이 이채롭다.

향단 (香壇)에서 내려다본 '심수정'과 이웃 건물들,그의 아우가 머물렀던 '심수정'이 손에 잡힐듯 가까이보인다.

향단에서의 보물에 대한 아쉬움을 해갈하고, 마지막 보물을 찾아 향한곳이 '우재(愚齋)손중돈' 이 분가하여 살았던 관가정(觀稼亭).관가정(觀稼亭)앞에도착하니 우뚝솟은 거대한 2그루의 은행나무가 나를 반긴다.어림잡아도 수령이 몇백년은 넘어 보인다.요즘 여기 저기 싸돌아 다니다 보니 대충 어림잡아도 300백년 이상은 될듯한데 별도의 안내판이나 설명서가 없어서 짐작으로만 상상할뿐 아쉬움이 남는다.

관가정(觀稼亭)앞의 노거수(은행나무)

관가정으로 통하는 일각대문 1981년 보수를 하면서 세운 관가정의 출입구이다.

관가정((觀稼亭)

보물 제 144호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150 

 

일각대문을 통과해서 좌측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관가정(觀稼亭)이란 현판글씨가 걸려있는 누마루와 수령을 짐작하기 어려운 향나무가 보인다.

관가정의 특징중에 특이한점은 보통 한옥의 경우 대문옆에 행랑채를 두고 안채와 분리를 시키는데 관가정에는 대문 왼쪽에 사랑방과 마루를 두었다.

정자 옆에 자라고 있는 수령을 알수없는 누운향나무 아마도 500년 이상은 될듯해보이는데,아마 '관가정'의 역사를 말하고 있는지도... 이상으로 신라천년의 고도에서 찾은 조선시대 중기 양반가옥과 평민들의 삶이 어울어져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여 아름답게 살아가는 경주 양동마을 답사기를 마칩니다.

아울러 보잘것 없는 내용과 사진을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면서 여기를 둘러보시고 출출하시다면 인근에 있는 싸고 맛있는집 한번 들러보시는것도 괜챦을듯합니다.

 

 

 

 

 

옥천식당

위치 안강읍내 (양동마을에서 안강으로 5분거리/

메뉴 : 어머니의 손맛같은 돼지찌개가 일품 

전화번호 : 054-761-2154

시골곰탕

위치 강동읍사무소 옆(양동마을에서 포항방향으로3분)

메뉴 : 곰탕,수육외

전화번호 : 054-762-99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