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조정,실직 따뜻한 가족사랑이 필요한때입니다.

2008. 12. 1. 09:42내새끼와 마눌...

 

 

 

모처럼의 휴일 저녁을 먹고나면 입안 가득 밀려오는 텁텁함으로 아이들 집사람 눈치보면서 계단으로 나가서 담배를 피우기 위해서 나갑니다.

평소에도 많이 피우는 담배는 아니지만 피우지 말라는 아이들 집사람 눈치보며 피우는 담배가 살짝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하지만 계단실 창문을 열고 한모금 깊게 담배연기를 빨고 창문쪽으로 내뿜는순간 싸늘한 바깥공기와 내밷은 담배연기가 뒤섞이여 다시 얼굴을

때립니다.앞쪽에 난 고속도로 무엇이 저리 바쁜지 수많은 차량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가로등불이 희미한 골목길...

아무도 보이지 않지만 새벽이면 저길을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일터로...목적지로 향합니다.

갑자기 가슴한구석에 불안감이 밀려옵니다.

언제부터인가 여기서 담배를 피울때면 뭔가에 쫒기듯 허둥지둥 담배를 꺼버리고 누가 볼까 서둘러 집안으로 들어와서 거실안을 이리저리

방황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아마도 IMF시절 집에서 재택근무를 하면서 생긴 습관인것 같습니다.

남들은 뭘그런거가지고 그러느냐~ 하실지 모르지만 저 자신은 그때당시 정말 힘들고(집사람은 더 힘들었을것)사람을 만나기를 꺼려하고

심지어 죽을생각까지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사람이란게 그리 쉽사리 죽을수 있는것도 아닙니다.

아내의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큰아들을 생각하면서 참고 또참고...

1997년 IMF의 직격탄은 전국에 있는 대부분의 건설사를 초토화 시켰으며...특히 대구에 있던 건설사들의 피해는 더 심각했습니다.

그래도 나름 다행이라 생각하며 다른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을당시...법원으로부터의 청천벽력과도 같은 차압통지서...

전에 다니던 회사의 부도로 회사가 직원들에게 보증을 세우고 빌린 주택자금을 회사가 부도가 났으니 개인이 변제해야 한다는 내용과 함께 날아온

2천 7백여만원의 청구서...할수없이 이자만이라도 납부하면서 원금상환을 미루고 지내던중 갑작스런 친구의 죽음...

고등학교부터 가장 절친했던 친구의 죽음.

친구역시 같은 회사를 다니면서 나와 마찬가지로 2천만원이상의 대출금이 있었고 가족도 있었다.

그해 크리스마스 아침 친구는 그렇게 떠났다.

아직 자신을 아빠라고 불러보지도 못한 한살짜리 아들을 두고 그는 그렇게 떠났다.

친구 집사람과도 고등학교때부터 친하게 알고 지냈었다.

갑작스런 친구의 죽음에 회사도 놀라고 친구들도 놀랬지만 정작 더 놀란것은 그의 아내였다.

여자로서의 치명적인 자궁암 진단...

친구의 장례식을 치르고 그녀와 함께 찾은 병원...여자로서 숨기고 싶고 감추고 싶은 이야기를 털어놓고 함께

그렇게 그녀는 수술을 했고 지금까지 두 아이를 키우면서 잘 지내고 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항상 해마다 그날이 되면 잊혀질만하던 친구의 얼굴과 그의 가족들이 생각난다.

 

얼마전 내가 귀국했을때 집사람과 애들을 데리고 친구의 무덤을 찾았었다.

친구의 무덤앞에서 풀을 뽑으면서 예전 우리가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니눈물이 흐른다.

영문을 모르는 아이들은 왜 그러는냐고 되묻는다.

이에 덩달아 아내도 눈시울을 적신다.그친구나 그의 아내가 무척 집사람을 좋아했다.

벌써 11년전의 일이다.

친구가 그렇게 떠나고 다음해 우리는 결혼을 했다.

과장 진급도 하고 결혼도 하고 IMF라 모두가 힘들어 했지만 우린 신혼의 단꿈을 꾸면서 8평 원룸에서신혼의 꿈을 키웠다.

신혼의 단꿈을 영글기도 전에 회사의 화의신청...그리고 구조조정 전직원 사표,전직원20%감봉...

그래도 좋았다.회사를 다닐수만 있다면...화의가 기각되고 전직원 일괄사표 과장급 이상직원20%감봉의 조건으로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수많은 직원들이 구조조정으로 현장을 떠나고 남아있는 직원들 조차도 급여가 6개월이상 밀렸다.

하지만 누구하나 불평불만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출근이라도 할수 있다면 좋았다.

계속되는 법원의 이자상환과 독촉장...그리고 아내도 임신7개월 더이상 아내마저도 직장을 다닐수 없었다.

결혼초부터 넣고있던 적금과 보험을 해약했다.

원금을 돌려받을수도 없었지만 누구에게 손벌릴수 있는처지도 아니고 손을 벌린다고해서 누가 선뜻돈을 빌려줄 그런 시기도 아니었다.

다들 힘들고 어려웠으니...친구를 만나기도 시골집에 찾아가기도 싫었다.

혹시라도 누가 '저친구 짤렸다더라"~~~'저친구 회사 부도났다 카더라'~~~라는 소릴 들을까봐서...

하지만 정작 누구도 나에게 그런소리를 이야기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작 내자신이...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의무를 다하지 몼한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불안하고 초조해지고...

하지만 하늘은 무심치 않았다.

회사가 법정관리가 개시 되면서 그간 밀렸던 월급이며 생각지도 못했던 보너스까지 지급을 해주었다.

재택근무도 끝이나고 새로이 현장도 배치를 받았다.

그리고 더 반가운 소식은 얼마뒤 법원으로부터 포기하고 있었던 퇴직금을 받아가라는 연락이었다.

갑자기 몇달만에 수천만원의 거금을 손에 쥐게 되었다.

그간 참고 아무말 안하고 살아준 만삭의 아내가 고마웠다.그래서 그돈으로 제일먼저 작지만 내이름으로된 아파트를 장만하였다.

세상이 아무리 힘들다해도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처음 세상에 빛을보는 아들에게 작은 원룸에서의 첫대면은싫었다.

처음 마련한 23평 아파트...그렇게 큰놈 혁이와 작은넘 민이는 거기서 태어나고...

새로 발령받은 현장이 부산이라 가족과 떨어져 생활했지만 나름  행복했었다.

그러든중 법원에서 날아온 최후 통첩장.빠알간 낙인을 찍어서 언제까지갚지 않으면 집을 강제 경매하겠다고...

어떻게 마련한 집인데~~~절대 내줄수가 없었다.

그때당시 수많은 주택회사들이 직원을 상대로 보증을 세우고 적게는 2천만원 많게는 1억이 넘는 주택기금을 대출받아 회사자금으로 유용했던 시절...

결국 회사가 부도가 나면 그돈을 개인이 변재해야했던 그런 시절이었다.

당장 목돈을마련할수도 없고 그렇다고 집을 빼앗길수도 없고...그렇지만 세상은 그렇게 나를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우연히 친한 불알친구 에게 몇개월정도의 여유자금이 있다는 연락을 받고 그돈으로 그날 바로 2천만원을 법원에 납부했습니다.

그때 도와준 친구,친구와이프...정말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또한번의 퇴직...회사와의 갈등으로 제가 블로그를 시작할때 6개월의 휴직...

가족들과 처음으로 이사를 가서 생활했던 포항에서의 생활.낯설고 물설은 객지였지만 가족들과 함께해서 행복했었습니다.

처음 포항에 갈때엔 포항에서 2년정도 생활해서 알뜰하게 모으면 은행대출금 다갚고 새로이 시작할수있겠다는 계획아래 첫출발은 희망이었지만

회사와의 갈등으로 인한 퇴사와 함께 6개월의 공백기간...

애들은 커가고 돈을 모으기는커녕 오히려 모아둔돈 다쓰고 빈털터리로 대구로 올라왔죠.

그렇지만 희망을 버리진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있고 두 아들이 있었으니까요.

새로이 직장을 구하고 처음에 마련했던 아파트를 처분해서전세금을 내어주고...

또다시 남은돈과 주택자금을 대출받아 전에 살던곳보다는 조금나은 곳으로 이사를 했습니다.지금은 그 대출금 원금과 함께 갚느라고 등골이 휘고

있지만 행복합니다.

사람 사는게 별것 있는게 아닙니다.그저께 아내의 신발을 보고 많이 마음아파 하면서 3만9천원짜리  부츠하나 사주고 내내 행복해하는 아내의 표정에서 사랑을 알았고, 어제 저녁 포항에서 첨 가족들과 노래방엘 가보고 두번째 노래방엘 갔었습니다.

두아들의 노래솜씨에 한시간이 훌쩍 지나고... 이런모습에 주인아주머니의 써비스로 30분을 더주었지만 그시간도 훌쩍...

월요일 아침부터 왠 구구절절 청승떠는 소리를 하시냐는 분도 있겠지만 이말은 꼬옥 드리고 싶습니다.

구조조정이니 실직이니 연일 매스컴에서 앞다두어 보도하는 그들에게는 '희망'이란 단어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정녕 이 사회에 우리들 가정에'희망'이란 단어는 없는걸까요?

아닙니다 이 박씨아재 과감히 말씀드릴수 있는것은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이 있고 따듯한 화톳불같은 믿음이 있다면 결코 이 추운 겨울이 힘들지만은 않다고...절망이라고 말하긴 이르다고 말씀드릴수 있습니다.실직 사표 구조조정...경제가 어려워 힘이들지만 사랑하는 남편, 아빠, 아버지를 위해서 우리 모두 따뜻한 위로의 한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