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신이 없는 무덤 '의관묘(衣冠墓)를 아시나요?

2009. 8. 2. 16:09바람따라 물따라

단계선생의 의관묘를 찾아서~

요일 아침 현장에 특별한 일은 없지만 아직 현장을 인수받은지 몇일 되지 않은터라 서류정리며 사소한

몇가지 일들을 처리 하려고 현장으로 향했습니다. 선산 인터체인지에서 내려 국도를 달려 상주로 향하던

길가에서 '단계선생의 무덤' 이 있다는 이정표를 몇일전부터 보아온터라 굳이 현장에 바쁜일도 없고해서

잠시 들러보기로 하였습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사육신(死六臣)' 의 이야기를 할때면 녹음기처럼 좔좔

읆어야했던 그분들의 이름을...그런데 이렇게 우연한 길에 그분의 무덤을 만나볼수 있다니 조금은

의아하기도 했고 또 사육신의 무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없던터라 상당히 궁금했습니다.

모든분들이 잘알고 계시지만 혹여 필요하신분들을 위해 단계 선생님의 이력을 잠시 소개토록 하겠습니다. 

필요하신분들은 더보기에서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더보기

 

하위지(河緯地)
본관은 진양(晋陽)이고, 자는 천장(天章) 또는 중장(中章), 호는 단계(丹溪)이다. 조선 태종 12년(1412) 선산읍 이문리에서 태어났다.

어릴때부터 형제가 문 밖을 나오지 않고 독서에만 열중하니 이웃 사람이 그 얼굴을 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세종 20년(1438)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집현전(集賢殿)에서 세종을 도와 많은 공적을 이룩하였다. 

문종 때는 병으로 고향에 돌아와서 더욱 학문에 열중할 때, 김종서(金宗瑞), 황보인(皇甫仁) 등의 명신들이 수양대군에게 참살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벼슬에 나갈 뜻이 없었다. 수양대군이 어린 단종을 내쫓고 왕이 되어 선생을 예조참판으로 불렀으나, 뜻을 굽히지 않고 나가지 않으니 왕의 독촉이 심한지라, 부득이 단종 복위를 계획하고자 벼슬에 나가 녹봉(지금의 월급)을 별실에 저장하여 두고(세조의 주는 녹을 먹지 않는다는 뜻) 단종 복위를 계획하였으나, 김질의 고변으로 인하여 선생을 비롯한 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유응부와 더불어 한날 참형을 당하니, 태연자약한 임종의 태도는 보는 이로 하여금 숙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연루로 선생의 형 강지, 동생 세지, 소지, 아들 연, 박도 참사를 당할 때 역시 조용한 태도로 충신 집안의 장함을 여러 사람에게 역력히 보였다.

그의 범상치 않은 생애는 탄생할 때부터 특이 하였으니 그의 집 앞 시냇물이 출생하는 날부터 사흘 동안 붉게 물들었으므로 이 개천과 그의 호를 "단계(丹溪)"라 부르게 되었다.

지금 선산읍 서쪽 단계천에 단계교가 놓여 있고 거기에 오리쯤 서쪽에 단계선생의 묘소(선산읍 죽장리 고방산)가 있으며, 비봉산 아래 선생의 유허비각이 있다.

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 선생의 교훈은 민족 역사상 영원한 귀감이 될 것이다.

숙종 때에 나라에서 그의 충성심에 감동하여 벼슬을 다시 내렸고, 영조 34년(1758) 이조 판서를 증하고 충렬(忠烈)의 시호를 내림과 함께 장릉 충신단 숙모전에 배향하고 사림이 충절과 덕행을 추모하여 서산(西山) 및 월암(月岩)서원을 세웠다.

  '청구영언'과 '화원악보'에 그의 시조 2수가 전해지고 있다.

  '객산풍편(客散風扁)하고 풍철(風撤)코 월락(月落)할제
   주옹(酒甕)을 다시 열고 싯귀(時句)를 흣부르니
   아마도 소인(小人) 득의처(得意處)는 이뿐인가 하노라.

  '전원(田園)'에 남은 흥(興)을 전나귀에 모두 싣고
   계산(溪山) 닉은 길로 흥치며 돌아 와서
   아이야 금서(琴書)를 다스려라 남은 해를 보내리라'

   참고문헌 : 이조실록, 퇴계 이황의 채언록, 삼인록

문화공보담당관실  김팔근  054-450-5065  / 수시 수정 /  

내용출처 : http://www.gumi.go.kr/ 와 다음 백과사전 검색에서 위의 검색어 사용검색결과 참고 작성함

 

골 국도변에서 만난 단계 선생님의 묘소가 있다는 안내판입니다.

안내표지판이 가르키는 방향으로 차를 몰아서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어디로 가야할지 잠시 망설였습니다.어디로 가야할지!

잠시 주변을 두리번 거리다가 바로 눈앞에 울창한 송림(松林)을 발견하고 별 망설임 없이 올라는데~무덤은 보이질 않고 평상과 쉼터만 덩그러니... 더위를 피해 나오신 어르신 한분만이 계시네요.

할수없이 어르신에게 여쭈었더니 옆으로 난길을 따라서 계속 올라가야한다고 하시길래 그냥 무작정 걸었습니다.

울창한 송림사이로 제법 정비한 흔적이 보이는 포도를 따라서 얼마가지 않아 단계 선생님의 묘소를 만날수 있었습니다.

 

묘소 입구에서 만날 '꼬불어진 소나무' 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치 절명해간 단계(丹溪)선생의 화신인양 가슴이 저며옵니다.

소나무를 보면서 잠시 어린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했던 사육신(死六臣)들의 심정을 헤아려 봅니다.

예로부터 역적으로 몰리면 삼족을 몰하는 가장무서운 형벌앞에서도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임금에 대한 충성과 신하로서의 도리를 저버리지 않았던 절개는 과연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과연 그분들이 몸바쳐 지켜내고자 했던 그무엇을...오늘날 한심스러운 나라꼴을 보고 무어라 하실지 그냥 죄스럽다는 마음이 듭니다.

 『묘소앞에 소나무

창한 송림(松林) 사이로 '문인석''비석' 이 보이고 제법 규모가 있어보이는 봉분이 보이네요.  마음을 경건히 하고 그분이 그토록 열망했던 그무엇을 찾아서 함께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단계 하위지 선생 의관묘

묘소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 흔한 안내판이나 설명이 없읍니다.

단지 묘비에만 단계선생의 묘라는 사실이...

처음 사진을 담고 둘러보고 참 아쉽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묘지앞의 좌판』

 

여헌 장현광의 단계 하 위지 선생 묘갈명 
군자가 변에 처하는 사업이 있으니 이 또한 하나의 의를 성취하는 것이네,
하고자 하는 바가 사는 것보다 더 중함이 있으면 사는 것도 버리며
싫어하는 바가 죽는 것보다 더 심함이 있으면 죽음도 피하지 않네
목은 도끼에 기름칠이 되었으나 공로가 강상(삼강오상 즉 인간의 도리)에 남아 있네
넉자 남짓 황폐한 무덤은 사람들로 하여금 머리가 꼿꼿이 서고 뼛골이 시리게 하니
이곳이 바로 선생의 의관을 보관한 곳이로다.
 

이글은 다음블로그참 나를 찾아 山寺로의 여행 에서...

 글을 쓰면서 다음에서 자료검색을 하다가 이 무덤이 단계선생의 의복과 갓을 묻어놓은 '의관묘(衣冠墓)' 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 무덤을 찾았을때 무덤에 관련해서 어떤 설명이나 안내서도 없었길래 조금은 당황하고 실망했었는데 우연히 (참 나를 찾아 山寺로의 여행 )님의

블로그에서 상세한 자료를 얻을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관리를 담당하고 있는 '구미시'에서 안내표지판이나 설명서를 비치했으면 하는 바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