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향이와 이도령은 이 사실을 알았을까?

2011. 10. 6. 08:35쓴소리단소리

 

※ 이건 좀 아니쟎아요?

선선한 목요일 날씨 좋습니다.

금연도전 101일째...

운동은 요즘 계속 먹고 마시고...

마전 전주와 남원으로 맛집 여행을 다녀온적이 있었습니다.

에덴식당에서 산채비빕밥을 너무나 맛나게 먹었기에 남원에 도착해서 추어탕을 맛보기전 춘향이와 이도령의 이야기가 있는 광한루를

둘러보았습니다.

수양버들이 휘휘 늘어진 광한루의 풍경 정말 절경이였습니다.

『 광한루 내부에 있는 정자의 풍경』

『 광한루 내부의풍경...』

광한루

광한루는 조선시대의 누각이다.

1419년 남원에 유배된 황희 정승이 선조인 황감평이 지은 서실을 헐고 다시 누각을 지어 ‘광통루’라고 불렀다. 1434년 당시 충청, 전라, 경상 삼도 순찰사였던 정인지가 달나라궁전의 경치만큼 아름답다고 감탄하면서 ‘광한루’로 이름을 바꿨다. 1957년 정유재란 때 불 탄 것을 인조 16년(1638), 남원부사 신감이 복원하였고, 그 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지금에 이른다.

앞면 5칸, 옆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연못을 앞에 두고 남향으로 배치되었다. 광한루 안에는 ‘호남 제일루’, ‘광한루’, ‘계관’같은 현액들이 걸려 있으며, 강희맹, 김시습, 김종직 등의 시문이 수두룩하다.

<춘향전>에서 춘향과 이도령이 처음 만나는 곳으로 유명하며, 경내에 춘향의 사당이 있다. 조선시대의 인공정원인 광한루원과 어우러져 빼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상세설명

누(樓)란 사방을 트고 마루를 한층 높여 자연과 어우러져 쉴 수 있도록 경치 좋은 곳에 지은 건물을 말한다. 이 건물은 조선시대 이름난 황희정승이 남원에 유배되었을 때 지은 것으로 처음엔 광통루(廣通樓)라 불렀다고 한다. 광한루(廣寒樓)라는 이름은 세종 16년(1434) 정인지가 고쳐 세운 뒤 바꾼 이름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정유재란 때 불에 탄 것을 인조 16년(1638) 다시 지은 것으로 부속건물은 정조 때 세운 것이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누마루 주변에는 난간을 둘렀고 기둥 사이에는 4면 모두 문을 달아 놓았는데, 여름에는 사방이 트이게끔 안쪽으로 걸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또한 누의 동쪽에 있는 앞면 2칸·옆면 1칸의 부속건물은 주위로 툇마루와 난간을 둘렀고 안쪽은 온돌방으로 만들어 놓았다. 뒷면 가운데 칸에 있는 계단은 조선 후기에 만든 것이다. 춘향전의 무대로도 널리 알려진 곳으로 넓은 인공 정원이 주변 경치를 한층 돋구고 있어 한국 누정의 대표가 되는 문화재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다음검색에서 자료발췌)

 

보물281호 광한루의 위용 

 본루는 보물 281호로써

시설물 보호를 위하여 출입을 금합니다.

문화재 관리를 위해서 아주 바람직한 설명입니다. 하지만 뒷쪽을 보시면...

 『 신발분실주의 경고안내...』

 

남원의 대표적인 관광지 광한루에서 박씨아저씨가 본 옥의 티 입니다.

물론 애교로 봐줄수 있다고도 하겠지만 근본적으로 아무도 관심깊게 살펴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남원을 대표하는 관광지의 보물 관리 상태가 이정도 수준이라면 다른곳은 보지 않아도 뻔(?) 한것은 아닐지...

어디 허접한 식당에나 있어야할 신발분실 주의문구가 왜 출입을 금지한 광한루 내부에 그대로 있어야 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혹시 외국인이 저문구가 궁금해서 물어본다면 무엇이라고 이야기를 해야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