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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박씨(密陽朴氏) : 시조 :
박언침(朴彦枕)
시조 언침은 박혁거세의 29세손인 경명왕의 맏아들로 밀성대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밀양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밀양박씨는 언침의 8세손인 언부를 중시조로 하는 문하시중공파를 비롯하여
도평의사사공파, 좌복야공파, 밀직부사공파, 판도공파, 좌윤공파 등으로 대별되고, 각 파는 후대로 내려오면서 다시 여러 파로
분파되었다.
가장 규모가 큰 문하시중공파는 종파인 은산군파, 행산군파를 비롯하여, 좌상공파, 규정공파, 사문진사공파, 밀성군파 등으로
나뉘어지는데, 이들은 다시 여러 파로 분파된다.
이중에서 규정공파가 밀양박씨 분파 가운데 가장 후손이 번창하여, 여기서 나눠진 낙촌공파,
강수문도공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외에 사문진사공파와 밀성군파, 좌복야공파 등에서도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문하시중공파의
중시조인 언부는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최충과 함께 태사를 지낸 후, 문하시중·도평의사를 지내고 밀성부원군에 봉해졌다.
고려말에
두각을 나타냈던 인물로 강생이 문과에 급제하여 참찬 의정부사에 이르렀으며 조선이 개국되어 호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다가, 훗날
수원부사를 지냈고, 문장이 뛰어나 당대에 문명이 높았다.
그의 아들 심문은 학행으로 천거되어 사온서 직장이 되고, 김종서의 종사관으로
야인을 토벌하였는데, 계유정난으로 김종서가 살해되자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복위를 꾀하다 사전에 탄로가 나자 음독 자결하였다.
위는 고려말에
극성했던 왜구를 격퇴한 무관으로 이성계를 따라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도순문사가 되어 쓰시마를 공격해 전선 3백여 척을 불태웠으며, 뒷날 이성계와
함께 찬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추대하여 그 공으로 충의군에 봉해지면서 공신이 되었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던 의중은 공민왕 때 문과에
장원하고 밀직제학을 거쳐 예문관 제학 겸 대사성이 되었으며, 조선이 개국되자 정도전, 조준 등과 함께 [고려사] 편찬에
참여하였다.
조선조에 와서도 밀양박씨는 선조의 훙륭함을 계승하여, 뛰어난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으므로 찬란한 중흥의 역사를 꽃피우게
되었다.
그 중 음악의 천재라 일컬어지는 연이 후세에 널리 알려졌는데, 그는 고구려의 왕산악, 신라의 우륵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악성으로
꼽힌다.
그는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세종 때 악학별좌로 음악에 관한 일을 맡아보다가 뒤에 예문관 대제학에 올랐고, 계유정난이 일어나
아들 계우는 처형되었으나 3조에 걸친 원로대신이었기에 죽음을 면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어려서부터 소질이 있어 휘바람을 잘 불었으며,
이웃에 피리를 잘 부는 사람이 있어 여가를 틈타 그에게 피리 부는 법을 배워 그 고장에서 피리의 명수가 되었다.
훗날 한양에 올라와 장악원
악사에게서 '음절이 속되고 곡조가 맞지 아니하며 옛 습관이 굳어져 고치기 어렵다." 라는 핀잔을 듣고는 기초부터 그 악사에게 다시 배워 수일
후에 스승인 악사가 감탄하여 "규범을 이미 이루었으니 장차 크게 통달하리라"라고 칭찬했다.
세종이 등극하자 그는 당시의 불완전한 악기의
조율정리와 악보찬집의 필요성을 상소하여 윤허를 받아, 편경 12매를 제작했다.
또한 조정의 조회 때 사용하던 향악을 폐하고, 아악의 사용을
건의하여 실행케하는 등 궁정음악을 전반적으로 개혁, 모든 의식에 아악을 주악하게 하므로 동양 궁중음악의 정수인 아악이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잇게
되었다.
심문의 친조카인 묵재 중손은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를 거쳐 도승지가 되고, 계유정난 때 병조참판으로 수양대군을 도와
정난공신 2등에 올랐으며, 세조가 즉위하자 이조판서를 거쳐 좌참찬에 이르렀고 밀산군에 봉해졌다.
건의 형 미도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의, 대사간 등을 역임하였으며, 그의 아들 의영, 광영, 증영, 소영 등이 모두 문과에 올라 가문의 번창을 이룩하였다.
무관으로 활을
잘 쏘아 명성을 떨친 거겸은 무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대호군에 올라 경흥부사로 재직중 야인 토벌에 전공을 세웠으며, 세조 때 첨지중추원사로
원종공신 2등에 봉해지고, 강릉부사와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성종 때 좌리공신 4등으로 밀산군에 봉해졌다.
청백리에 녹선된 열은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좌랑을 거쳐 공조, 예조 이조판서 및 대사헌, 좌참찬을 역임하였다.
중종 때의 무신으로 학문에도 뛰어나 많은 제자를
길러낸 영은 양녕대군의 외손자로서 일찍부터 무예에 뛰어나 원수 이극균을 따라 건주위를 토벌하고 선전관이 되었다.
연산군이 즉위하자 장차
정치가 어지러울 것을 예견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에만 힘썼는데, 무신인 그는 평소에 "말 타고 칼 쓰는 일은 용맹한 사나이가
하는 일이지만, 글을 배우지 않으면 어찌 군자가 되겠느냐"라고 하면서 문무를 겸비하였다.
또한 천문, 지리, 산수 등에 통달하였으며, 특히
의학에 정통하여 [경험방], [활인신방] 등의 의서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충원은 밀양박씨가 낳은 대유학자로, 명종 21년에 퇴계 이황의
후임으로 홍문관 대제학에 임명되어 양관대제학의 명예를 누렸고, 선조 때 이조판서, 좌찬성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계현은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에 뽑혔고 선조 때 대사헌으로서 당쟁의 완화에 힘썼으며, 당시의 권신이었던 윤원형의 청혼을 거절할 정도로 지조가 있었다.
후에
병조판서를 지냈으며 그의 저서로 [밀산세고]가 전해진다.
종남은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지내고, 선조 16년 북방에 침입한 호적
나탕개를 격퇴하고 두만강 넘어 야인의 소굴을 소탕하여 절충장군으로 승진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춘천 방어사로서 왜군의 북진을 막았으며,
이순신의 주사조방장이 되어 연해오읍의 군병을 장악하고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그의 아들 충장공 영신도 선조 38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는데,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증살하려는 것을 반대하여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오위장, 풍산부사 등을 지내고, 이괄의
난을 진압하다가 포로가 되어 끝까지 그들에게 반대하다가 참살당했다.
이서는 선조 때 문과에 올라 정언, 교리를 지냈는데, 당시의 권신인
이이첨을 논박하다 파직되어 여주에 은거하였다.
광해군 때 사간으로 다시 등용되어 대사간, 관찰사,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던 중 폐모론이
거론되자 여러 차례 대북파의 탄핵으로 삭직되었으나, 뒤에 복직되어 진위사로 명나라에 다녀오다가 해상에서 풍랑을 만나
행방불명되었다.
밀양박씨 가문에서 유일하게 영의정을 지낸 승종은 충원의 증손자로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광해군 때 영의정에 올라
밀양부원군에 봉해졌다.
당대의 권신이었던 이이첨 등이 인목대비를 죽이려는 계획과 폐모론의 주장을 적극 반대하여 폭정에 휘말려 들지
않았으며,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축출되자 그의 손녀딸이 광해군의 세자빈으로서 권세를 누렸던 일을 자책하여 목매어 자결 하였으므로 세인들은 이
일을 자의사건이라 하였다.
이외에도 청백리로서 서예에 뛰어난 신규와 [돈령록],[겸재집] 등 많은 저서를 남긴 성원이
유명하였다.
제가는 19세 때 연암 박지원에게 글을 배워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와 함께 시집 [건연집]을 발간하여 우리나라의
[시문사대가]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졌다.
평소 그는 중국의 신문물을 받아 실학의 대가를 이루었고 탁상공록과 같은 성리학을 비판하여 현실적인
학문을 추구, 개혁주장의 선구자로 당시의 지각있는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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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예산군 일원
충북 청원군
일원
전남 진도군 조도면 일원
경북 청도군 금천면 신지동
경남 밀양군 일원
경남 의령군 일원
전남 진도군 의신면
칠전리